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깊이
- ‘심심해’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
-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 루소가 말한 ‘텅 빈 시간’
이 글은 5편으로 구성된 《즐거운 철학 – 유쾌하게 생각하는 연습》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1편에서는 ‘행복’이라는 감정이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자 사유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심심함’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철학을 탄생시키는지, 그리고 그 여백의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사유해보려 합니다.
현대인에게는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켜고, 짧은 영상과 알림 속에 ‘비는 시간’을 채워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은 묻습니다. “심심함은 정말 지루한 감정일까요, 아니면 생각이 자라나는 땅일까요?”
심심함, 생각이 자라나는 가장 조용한 토양
‘심심하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심심함은 사유의 출발점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심심해서 그림을 그리고, 공상을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놀이를 했습니다.
심심함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 수 있는 드문 시간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가장 말이 많아지는 때는 외부 자극이 사라졌을 때입니다.
루소는 말했습니다. “산책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을 따라 걷는 일이다.”
산책이 가능한 조건은 단 하나, 심심함입니다. 바쁨은 생각을 끊고, 심심함은 생각을 연결해 줍니다.
우리가 자란 시절, 심심함은 상상력의 놀이터였죠.
그 토양이 메말라 갈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미디어 시대, 사유가 들어설 틈은 있을까
지금 우리는 3초 안에 재미를 줘야 살아남는
콘텐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눈이 심심하지 않도록, 귀가 조용해지지 않도록, 모든 감각이 자극을 받습니다.
그러나 철학자 파스칼은 오래 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혼자 조용히 방 안에 머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조용한 시간을 낭비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 나의 깊은 생각과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심심함은 멈춤이 아니라, 나를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자극이 많아질수록 나의 내면은 점점 침묵합니다.
그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고 들여다볼 때, 삶은 다시 나를 중심에 놓기 시작합니다.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면 삶도 버거워진다
지루함을 피하려고 우리는 끝없이 소비합니다. 쇼핑, 영상, 관계까지도 소비 대상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많은 것을 소비해도 우리는 여전히 허전합니다. 심심함을 견디는 힘이 없으면, 삶의 느린 호흡도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지루함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느끼는 가장 강한 신호다.”
심심함은 무기력이 아니라, 존재가 나에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말을 거는 순간입니다.
무의식적인 소비는 감정을 마비시키고, 존재를 흐리게 만듭니다.
심심함을 감정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성숙의 시작입니다.
텅 빈 시간에 찾아오는 것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 사유가 들어설 수 있는 틈이 됩니다.
혼자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는 시간, 산책 중 아무 이유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 거기서 가장 나다운 질문이 피어납니다.
플라톤은 말했어요. “생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조용함 속에서 솟는다.”
텅 빈 시간은, 삶이 나에게 말을 거는 창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들이 쌓여, 삶의 가장 내밀한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그 조용한 틈이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이야기가 자라나기 시작해요.
심심함은 감정이 아닌 철학적 능력
심심함을 감정으로만 받아들이면 피하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철학은 그것을 능력으로 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견디는 힘은 곧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생각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기다리고, 그 틈에 들어와 자라납니다.
다음번엔 심심한 순간이 온다면, 그걸 밀어내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철학의 문장’을 기다려 보세요.
심심함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삶을 덜 조급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여백을 품는 마음이 곧 사유의 자리를 지켜주는 힘이 되죠.
다음 편에서는 ‘괜히 웃긴 날, 의미 없는 기쁨의 철학’으로 유쾌함과 웃음 속에 숨겨진 존재의 깊이를 함께 나눕니다.